설립자이신 영파(映坡) 김기석(金琦石) 대표이사는 재가(在家) 승려로 대중 속에 뛰어들어 생활 불교를 통한 포교사업에 전념해 오셨던 대화상(大畵尙)이시다. 김해(金海)가 본관으로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출가하여 평생 종교에 귀의하여 수도승이기보다 포교승으로 대중 속에서 생활하신 생활인이시다.
서기1906년 음력 5월 2일 5대 독자로 태어나셨으나 8살 어린 나이에 양친 부모님을 모두 여의게 되어 혈혈단신으로 전북 금산사(金山寺)에 출가하여 일찍이 불가와 인연을 맺게 되셨다. 그곳에서 15세 때 황도식 큰 스님을 은사로 불가(佛家)에 입문하여 금산사(金山寺) 대교과를 수료하시고 은사님의 배려로 1931년 일본 경도 임제대학교를 졸업하신 학구파로 스님께서는 열반하시는 날 까지 오직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생활불교를 통해 종교의 참 모습을 알리는데 앞장서 오셨다.
대학 수료 후 그곳 사찰에 머물며 우리 동포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과 민족혼을 심기에 열중해 일본 경찰로부터 항상 요주의 인물로 지목 받게 되었다. 당시 경도시에는 일본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이들이 서로 소식을 전하고 타향에서 겪는 외로움 달래며 회포를 풀 수 있는 곳으로 사찰이 유일한 장소였었다. 불사(佛事)가 있거나 초하루 보름이면 자연 신도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이런 날 예불을 마치고 나면 신도들에게 민족혼을 심는데 주력하였다.
스님께서는 늘상 승복(僧服) 아니면 한복차림으로 다니시니 일본인의 비위를 거슬리기에 충분했었다. 자연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늘 감시 속에 있었다. 하루는 택시를 타느라 차례를 기다리던 중 일본경찰이 앞에 있던 우리 동포를 밀쳐 내고 폭언을 하며 기어코 먼저 차에 올라 떠나려 했었다고 한다. 이를 본 스님이 택시를 가로막고 시비가 벌어져 끝내 경찰관과 택시기사에게 중상을 입힌 것은 물론 차량이 파손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었다. 스님께서는 원체 체력이 건강하셔서 웬만한 장정들은 그분을 당해내지 못 할 정도로 힘이 장사였으니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다듬이 돌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마당으로 내팽개칠 수 있을 만큼 힘이 장사였으니 그들이 크게 다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지 않아도 빌미가 없던 차라 이로 인해 결국 폭행상해에 사상범으로 몰려 부산에 있던 대신동 감옥으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렇게 고국에서 수감생활 중 노역시간을 틈타 그곳을 탈출하게 되었다. 다행히 스님의 처가가 대신동에 있어 그곳에서 우선 피신을 준비하고 곧장 떠나 숨은 곳이 바로 충남 계룡산(鷄龍山)이었다. 때마침 스님의 은사이신 황도식 큰 스님께서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신원사(新元寺) 조실로 계셨기에 이곳에 쉽게 은둔 할 수 있었다. 그때가 1940년으로 국내의 치안 상태가 허술한 탓에 스님의 은둔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워 신원사(新元寺)에 계시면서도 수도에 국한하지 않고 조양고등공민학교(朝陽高等公民學校)라는 야학을 차려 낮에는 어린이에게 밤에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문자교육과 농사법에서부터 역사에 이르기까지 생활에 필요한 교육에 정열을 쏟으셨다. 또한 사찰 경내에 계룡학사(鷄龍學舍)라는 아동보호시설을 설치하여 거리를 떠도는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었다.
해방이 되자 충남지구 포교사로 재직하시며 정규학교의 필요성을 느끼시고 지역유지들을 설득하여 대전보문중학교(大田普門中學校)를 설립하고 직접 교단에서 우리 2세들을 지도함으로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다. 이 같은 사회활동으로 인해 맡고 있었던 신원사(新元寺) 주지에서 물러나 산중턱에 보광원(普光園)이라는 조그만 암자를 일으켜 기도 처를 마련해 두고 수도생활보다 포교활동에서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에 매진하심으로서 산중에 머무는 시간보다 대중 속에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호흡했었다. 이처럼 스님께서는 민족혼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민족주의자요 생활불교를 실천해 오신 참 종교인이셨다.
해방 후 신원사(新元寺)와 함께 계룡산(鷄龍山) 3대 사찰(寺刹) 의 하나인 갑사(甲寺)에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님께서 머무시던 시기라 자연적 그분과 자리를 함께 하시면서 그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같은 그분과의 만남은 오히려 스님께서 훗날 평생 동안 격동기를 살아야 했던 우리나라 근대사의 혼란기 속에서 더 외롭고 고달픈 일생을 사시게 된 근원이 되었다고 본다.
해방이 된지 얼마 후 6.25라는 민족적 불행을 맞아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돌보던 많은 가족들을 팽개치지 못해 한동안 그곳에 머물기도 했었다. 전쟁이 차츰 치열해지기 시작하고 더욱이 계룡산(鷄龍山) 일대가 빨치산의 본거지가 되어 피아간에 전투가 벌어져 날마다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룡산(鷄龍山) 아래 동네가 낮에는 국군이 점령하고 밤이면 빨치산이 휩쓸어 죄 없는 양민들만 고생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이처럼 밤낮으로 전쟁터가 되어버린 산골마을에서 더 이상 스님께서 머물기에는 한계에 도달해 1951년 7월 계룡학사(鷄龍學舍)를 가정사정으로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유 충식 총무에게 맡기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수도 처였던 보광원(普光園)은 은사이신 황 도식 큰 스님께서 연세가 높으셔서 계속 그곳에 머무시겠다 하여 하는 수 없이 혼자 떠나시게 되었다. 피난길에 오르신 김 기석 스님께서는 결국 부산으로까지 내려오시게 되었고 마침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동에 소재한 화엄사(華嚴寺)의 주지를 맡게 되시어 조용히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되셨다.
화엄사(華嚴寺)는 지금의 동의공업전문대학이 자리하고 있는 황령산(荒靈山) 서쪽 산 중턱에 위치한 일본식 사찰로 해방과 더불어 사찰에 있던 일본승려들이 돌아가고 오랫동안 주인 없는 사찰로 팽개쳐져 있은 관계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영파(映坡) 김 기석(金琦石)대표이사께서 부산에 내려와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신도들이 주지로 모시게 되었고 오래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중이라 대웅전이랑 살림집이 허술해 질대로 허술해져있었다. 스님께서는 주지로 취임하시게 되자 해방 후 국가재산으로 귀속되어 있는 사찰을 곧장 불하부터 받아내고 건물 전체를 말끔히 개수하여 사부대중의 수양 처로 자리 잡아 갔었다. 이곳에 새로운 산문을 여시고 조용히 공부에 증진하시게 되셨지만 지나온 세월이 말해 주듯 주위에서 그냥 두지 않아 항상 사회현장에서 이웃과 아픔을 함께하며 신앙의 세계를 실천하시고 계셨다.
이미 불교계에는 스님의 명성이 알려져 있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부산의 각 산문에서 스님을 알게 되었고 마침 원불교 교단에서 운영하던 영락양로원(永樂養老院)이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스님께 자문하게 되었다. 결국 교도들의 힘만으로 운영한다는 것이 어려울 뿐 아니라 자생력이 없다 판단하고 시설을 화엄사(華嚴寺)로 옮기고 운영까지 일임하게 되었다. 스님께서 운영을 맡자 그 동안 교도들의 갈등으로 진척되지 못했던 시설인가를 얻어냄으로써 명실상부한 사회복지시설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시설인가를 받아야 사회복지시설로 운영할 수 있건만 운영진의 잦은 교체로 행정절차를 미처 받지 않아 제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6. 25 전쟁이 정전협정 체결로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갔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이외로 컸었다. 거리마다 가족과 재산을 잃고 돌아갈 곳 없는 피난민들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극도의 사회적 불안과 급변하는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정신이상으로 거리를 헤매며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며 불안을 조성했었다. 국가가 당연히 이들을 거두어야하건만 나라가 어렵다보니 거리 곳곳에 이들이 노숙하며 걸인생활을 했었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이를 보다 못한 김 기석(金琦石) 대표이사께서 이들을 양로원 한쪽에 자리를 마련하여 우선 의식주를 해결해 주기 시작하였다. 얼마지 않아 환자들의 수가 차츰 늘어나기 시작하자 단순히 수용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치료를 병행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당시 우리의 의료수준이 후진국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시절이라 특히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가 제대로 개발되어있지 않았었다. 단지 한의학에서 시술하는 한방과 침 뜸이 전부였기에 법인에서 한의사를 채용하여 이들을 돌보게 했었다. 뚜렷한 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탓으로 이외로 한방치료가 효과를 거두어 많은 환자들의 병세가 호전되었고 소문을 듣고 환자들이 몰려왔지만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치료법은 현대 의학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면에서는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황토 찜질방 원리와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대표이사께서 사찰 근처 황토로 손수 흙벽돌을 찍어 토담집을 짓고 나무로 방을 데우니 영락없는 황토 찜질방이 되었고 여기에 한방과 침 뜸을 병행 하니 그 당시의 의료 수준으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러한 치료법이 이외로 효과를 거두어 세월이 갈수록 환자들 수가 늘어나 별도의 독자적 운영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김 기석(金琦石) 대표이사께서 평소 남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한 가슴과 불의 앞에 물러서지 않는 성격 때문에 자신의 주머니는 언제나 비어있었고 가족들까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거리를 지나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호주머니를 몽땅 털어 주고 먼 길을 걸어오기는 다반사였고 심지어 집에 찾아온 걸인에게까지 언제나 밥상을 차려 주게 하는 성격 탓에 가족들이 겪는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사모님께서 결혼식 주례 때나 귀한 자리에 입으실 옷을 별도로 장만해드렸더니 처음 외출하신 날 사치스럽고 거추장스럽다며 남에게 벗어주실 정도로 근검절약 하시며 평생을 사셨다. 그러면서도 남의 어려움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탓에 가정에는 언제나 가족들 보다 손님이 더 많았으니 지난 날 이웃들이 피난 와 도움을 청했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머물고 있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김기석(金 琦石) 대표이사님께서 남달리 많은 사람들을 가까이서 친척이상으로 의지하고 도우며 생활하시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생활불교를 실천하고자하는 의지도 계셨지만 5대 독자로 8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외롭게 살아오시느라 사람에 대한 그리움 탓이라 여겨진다. 이런 환경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가친척의 인연을 맺고 서로 오가며 의지하였으니 그분들은 혈연으로 이어진 친척보다 더 뜨거운 정으로 맺어져 오늘날까지 일가친척보다 더 가까운 인연으로 살고 있다. 이렇게 남에게는 더 없이 후하시면서 자신과 가족에게는 철저하게 엄격하셨으니 사모님께서 한번은 농담 삼아 평생에 실반지 하나 지니는 게 소원이라 하신 적이 있었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런 것을 지니면 도둑이 따르게 되어 오히려 화의 근본이 되어 사모님을 위해 위험한 것을 허용할 수 없다며 끝내 거절하신 일화가 있을 만큼 사치와는 철저하게 거리가 머셨다.
1950년대 후반 정치적으로 아직 훈련되지 않은 우리 국민들에게 찾아 온 낯선 민주주의는 역으로 일당독재에 의한 정치 불안과 독재 정권을 낳았다. 자유당정권의 단말마적 정권 야욕으로 사회는 극도로 혼란에 빠졌고 평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이 같은 정치 사회적 혼란은 스님의 불같은 성격을 그냥 두지 않았었다. 자유당 정권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과 저항은 끝내 반정부인사로 의심받아 결국 어처구니없는 누명으로 경찰에 연행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경찰에 연행되던 날 석간에 대문짝만하게 “목탁 속에 숨겨진 난수표” 라는 제목으로 스님이 마치 간첩행위를 하다 검거된 것처럼 기사가 실렸었다. 스님의 불같은 성격은 이런 누명을 그냥 당하실 분이 아니었기에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경찰관에게 책상 위 재떨이로 경찰관에게 상처를 입힌 불상사까지 일으킨 일은 그 분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자유당정권에 대한 강한 비판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아 사찰에는 늘 정보형사가 살듯 머물며 끼니때면 한자리에서 식사도 하느라 나중에는 가족처럼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 갔었다. 한가한 날은 정보형사를 불러 앉혀 자신의 역사관과 국가관을 펼치시므로 나중에는 그마저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남을 설득하시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시었다. 이는 그분의 가슴에서 울어 나오는 진실한 주장이었기에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본다. 이처럼 스님께서는 가장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곧고 바르신 생각과 행동 때문에 자신은 항상 외롭게 사셨다.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으시고 교육사업에 매진하셨고 생활불교를 실천하는 길이 사회사업임을 주장하시며 남보다 앞서 이 길을 걸으셨다. 국가나 남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자립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누구보다 먼저 사회복지사업에 자활조성사업을 시도하셨던 선각자이시기도 했다. 한편 “부산시 사암연합회”를 이끌어 가시며 전통불교문화의 계승발전에 이바지하여 부산시 무형문화제인 “영산제”를 발굴하여 수제자로 하여금 계승케 하셨고 불경을 현대판으로 인쇄하여 불경보급에 기여하셨다.
1974년 12월 3일 이른 새벽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쓰려지셔서 열반하시는 순간까지 자신을 위하여 하루도 편히 쉬신 적 없이 오직 중생계도와 구제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셨던 영파(映坡) 김 기석(金琦石) 대표이사의 일생은 법인 뿐 아니라 우리 근대사에도 족적을 남기신 잊을 수 없는 선각자이시기도 하다.